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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수능을 마치고 해야 할 공부
등록일 2020-12-04 10:33:43 조회수 1001
내용

코로나19로 일정이 늦춰진 2020년 수능이 끝났다. 힘들게 수능을 치른 수험생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다. 의례적인 격려가 아니라, 2020년의 고3 수험생은 정말로 고생이 많았다. 고등학교 교장으로서 고3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수능을 마친 고3 학생들에게 수고했다는 말 이외에 또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아이러니컬하게도 ‘공부하자’라고 권하고 싶다. 수능을 어렵게 마쳤는데, 곧바로 또 공부하자고 하니 이게 무슨 고문같은 소리란 말인가? 도대체 뭘 또 공부하자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 수능 대비 같은 공부는 그만하자는 것이다. 수능을 위한 공부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일 뿐, 이제부터는 진짜 공부, 공부다운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공부가 공부다운 공부인가? 한국인에게 공부하면 주로 떠오르는 말은 다음의 세 가지일 것이다.

 

(1) 공부해라. 배워서 남주냐?
(2) 공부에 왕도(王道)는 없다.
(3)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1)은 공부가 가져다주는 결과로서의 혜택을 말한다. 공부하면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공부는 결국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니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공부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도 많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확대 해석하면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라는 의미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그리고 타인이나 사회를 위해서도 공부는 좋은 것이고 쓸모가 있는 것이다.

 

(2)는 공부의 과정 또는 방법을 말한다. ‘왕도(王道)가 없다’라는 말은 공부에 특별한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특별한 요령이나 지름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꾸준히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공부의 방법보다는 공부의 양(量)이 중요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공부의 정도(正道)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자(孔子)의 위편삼절(韋編三絶)이나 두보(杜甫)의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에서 보듯이 우리가 제대로 공부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3)은 공부가 가져오는 현실적인 결과보다는, 공부 자체로부터 얻는 정신적인 소득을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해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핵심은 공부 자체가 기쁘다[說]는 것이다. 배움과 공부에서 얻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기에 논어(論語)의 첫 마디부터 등장할까! 어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기쁨 중에서 공부를 최고의 기쁨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기쁨을 논어(論語)의 다른 곳[子罕篇]에서는 욕파불능(欲罷不能)으로 표현한다.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다’는 말이다.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여건상 그만두려고 해도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위와 같은 세 가지 공부의 의미에서 볼 때, 수능 공부는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수능 공부가 나에게 진정한 혜택을 주는 공부인가? 더 나아가 타인과 사회에 도움을 주는 공부인가? 그리고 수능은 정도(正道)보다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요령, 삐뚤어진 왕도(王道)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수능 공부할 때마다 공부 자체의 기쁨을 느끼는가?

 

수능을 마친 고3들이여! 이제 제대로 된 공부를 하자. 정말 의미가 있는 공부를 하자. 공부 자체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공부를 하자. 어떻게 하면 이런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 그리고 이런 공부를 위해 학교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매김해야 할까?

 

첫째, 정답이 없는 공부를 하자. 수능에서 강요하는 정답 찾기 공부는 그만하자는 것이다. 공부는 원래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어제와 다른 물음을 던지는 과정이다. 공부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타성에 물음표를 던져 당연한 게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공부는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며 별다른 관심을 가져보지 못한 영역에 물음표를 던져 생각의 타성에 탄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다(유영만, 『공부는 망치다』, 2016). 묻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그런데 수능은 공부를 질문의 과정이 아니라 정답을 찾는 선택의 과정으로 만들어버렸다. 선택도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매력적인 오답의 유혹을 물리치고 출제자가 정해놓은 한 가지를 정확하게 찍어야 한다. 국가에서 정답으로 공인해놓은 한 가지를 정확하게 찾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왜 매년 전국의 고3들이 배움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출제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정답을 찾아 사냥에 나서야 하는가? 정답을 찾을 때까지 잘못된 선택을 계속 붙들고 늘어지는 오답노트 공부전략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이제 정답이 없는 공부를 하자. 이미 정답 찾기에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이게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정답을 전제하지 않은 자유로운 배움의 과정에 혼란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공부의 대상인 세상은 수많은 현상과 의견이 있을 뿐, 모든 사람이 일치하는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굳이 답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닌 물음의 방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쉼 없이 질문을 던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어떤 배움 또는 깨달음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답은 물음표 속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끈질긴 질문으로 물음표를 아래로 계속 잡아당기면 느낌표가 된다. 느낌표를 품고 있는 물음표가 도처에서 우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정답이 아니라 물음표를 사고파는 시장이 되어야 한다.

 

둘째, 다양한 언어를 공부하자. 우리는 공부하면 두 가지 방식을 떠올린다. 하나는 다방면에 걸쳐서 하는 공부, 즉 넓게 하는 공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어떤 분야를 심도 있게 하는 공부, 즉 깊게 하는 공부가 있다. 넓은 공부, 깊은 공부가 모두 필요하지만, 다양한 언어를 공부하자는 것은 우선 넓은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다양한 언어로 내뱉는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고, 니체(F. W. Nietzsche)는 ‘꿀벌은 밀랍으로 집을 짓고 살지만 사람은 개념으로 집을 짓고 살아간다’고 했듯이,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사용하는 언어[개념]들이 한정되어 있거나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떤 말로 해야할 지 몰라 답답해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많은 말을 하지만 같은 말을 중언부언(重言復言)하고 있음에 스스로 안타까워하는 학생도 많이 본다. 풍부한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과정과 교과서라는 갇힌 공간에서의 한정된 언어들로 인해 사고(思考) 또한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 언어마저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글자대로 외워버렸기 때문이다. 고득점을 위한 학습전략으로 개념학습이라는 전략을 강조하는 웃지 못할 장면도 나타난다.

 

이제 다양한 언어들을 공부하자. 교과서에 갇힌 언어를 넘어 세상에 존재하는 엄청난 언어와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나보자. 어려운 언어라고 피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가 풍부할수록 우리의 삶도 풍부해진다. 들뢰즈(G. Deleuze)는 개념이 곧 인격이라고 했다. 그 사람의 인격과 품격 수준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개념,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된다. 현재 우리 사회의 언어는 너무 무섭다. 관용과 이해의 언어보다는 정죄(定罪)와 혐오(嫌惡)의 언어가 넘친다. 수많은 풍부한 언어들이 편가르기 언어의 대표주자에 묻혀 숨을 죽이고 있다. 그 풍요로운 언어들을 끌어내어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다양한 언어들을 만날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이 되어야 한다.

 

셋째, 사람을 사랑하는 공부를 하자. 지금 우리 교육에는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코딩 등 미래를 향한 생존 전략들이 판을 치고 있다. 어디를 찾아봐도 따뜻한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뿜는 따뜻한 사랑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미래를 얘기하면서 두 가지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하나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공존할 수 있는 삶의 뉴노멀을 찾아야 한다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만의 고유한 장점으로 정서, 감정들을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인간만이 사랑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2001년에 개봉한 ‘에이아이(AI)’라는 영화에서는 미래의 지구에서 인간을 사랑하게끔 프로그래밍된 최초의 로봇 소년 데이빗이 등장한다.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 소년은 입양된 가정의 인간 엄마에게 시공간을 넘어서는 영원한 사랑을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과 함께 섬뜩함도 느꼈다. 원래 사랑의 존재로 태어난 진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사랑이 점점 식어가고 있는데, 미래에 나타나게 될 인공지능들은 영원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니!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사람의 정서, 감정은 넘볼 수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프로그래밍된 사이비 사랑일 뿐이라고 치부할 것인가?

 

사람을 사랑하는 공부를 하자.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공부가 필요하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정서이지 공부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람 경시의 사례를 보면, 사랑의 정서 부족보다는 제대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자신의 출세와 생존을 위해서는 모든 자원을 투입하여 공부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공부는 언뜻 보면 어렵다. 수능 시험 과목처럼 교과서도 없고 공유화된 매뉴얼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 어느 공부보다도 쉽다. 특정 교과서나 매뉴얼에 얽매임이 없이 자기의 형편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평생 공부해야 할 항목에 사람에 대한 사랑도 포함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사람 사랑법을 공부시키는 사랑학 교실이 되어야 한다.


<출처> 서울신서고등학교 교장 송재범  https://21erick.org/column/5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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